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다안의 침입 (문단 편집) == 배경 == [[대몽항쟁]] 이후 [[고려]]는 [[원 간섭기|원나라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게 된다.]] 고려의 제24대 [[원종(고려)|원종]](元宗)은 [[몽골 제국]]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세조 [[쿠빌라이 칸]] 군대와 [[아리크 부카]] 군대와의 내전에서 쿠빌라이의 편에 붙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YuanEmperorAlbumKhubilaiPortrait.jpg|width=100%]] || || '''[[쿠빌라이 칸]]''' || 그 무렵, 원나라의 초대 [[황제]]가 된 쿠빌라이 칸도 다른 문제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었다. 같은 [[몽골 제국]]의 계승 제국들 중 하나였던 [[오고타이 칸국]]의 [[카이두]]와의 내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대 [[중앙아시아]]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었던 카이두는 칸을 참칭한 후, 제5대 대칸이었던 쿠빌라이에게 격렬하게 대항했는데, 그 시작은 1277년 카이두가 알말릭에서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으로 진격하면서부터였다. 이에 쿠빌라이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명장]] [[바린 바얀]](伯顔)을 [[중국]] 대륙에서 소환했다. 바얀은 카이두 반군의 군인인 시리기 등과 오르콘 강 부근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이르티쉬 강까지 밀어버리는 군공을 세웠다. 헌데 이러한 실패를 맛본 카이두는 포기하지 않고 1287년 새로운 동맹을 구성하여 다시 한번 쿠빌라이에 대항했다. 이때 카이두가 끌어들인 방계 몽골 지파들의 지도자들은 나얀(乃顔), 식투르(勢都兒), 그리고 카다안(哈丹) 등이었다. [[칭기즈 칸]]의 막내아우 테무게 옷치긴(鐵木哥 斡赤斤)의 후손이었던 '''나얀'''은 제국의 동북부 만주 지역을 영지로 가지고 있었으며, '''식투르'''는 칭기즈 칸의 큰 아우 카사르의 손자였고, '''카다안'''은 둘째 아우 카치운(合赤溫)의 손자였다. 이들의 근거지는 동몽골과 만주 지역이었는데 카이두의 서방 세력과 결합하여 동•서에서 협공한다면 쿠빌라이에겐 대단히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쿠빌라이는 재빨리 움직였다. 쿠빌라이가 선택한 패는 자신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장수인 바린 바얀이었으며, 바얀에게 카이두를 저지하도록 시키고, 72세였던 자신은 직접 나얀과 전투를 치러 그를 패배시키고, 나얀을 사로잡아 목숨을 빼앗았다.[* 본래 몽골 사회에서는 혈통을 중시하는데, 같은 [[보르지긴]] 왕가의 친척이었던 나얀은 나름 명예롭게 죽었다. 다만 그 명예로운 방식이 질식시켜 피를 흘리지 않게 하는 방법이었다. 좀 부정적으로 적었지만, 몽골에선 이것이 정말 명예로운 방식이었다. 칭기즈 칸에게 죽었던 자다란 [[자무카]] 또한 이런 방식으로 죽었다고 한다. 일단 대부분 이렇게 믿고 있다. 사실이야 뭐... 전승으로는 그렇게 전해지며 원나라에서도 높게 평가받았던 인물인지라 대체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한편, 이 전란 동안 눈치를 살피던 [[충렬왕]]은 장인이었던 쿠빌라이 칸의 점수를 따기 위해 1287년 5월 12일, 장군 [[류청신|류비(柳庇)]]를 파견하여 나얀의 반란 토벌에 한 몫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쿠빌라이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에 한희유(韓希愈) 등의 장수들과 충렬왕 본인이 직접 원나라로 향하기도 했다 헌데 아직 남아 있는 반란 세력으로 카다안의 군대가 있었다. 테무르 울제이투(Temur Oljeitu)는 이 카다안의 반란 세력을 패퇴시켰는데, 남은 잔당들은 이후 다시 세력을 일으키려 했으나 나이만다이(那蠻歹)에게 패배해서 더 이상 [[만주]] 지역에서 세력을 일으키긴 힘들었다. 카다안의 세력은 원나라와 죽을 때까지 싸울지 항복할지를 논하다가… '''[[일본을 공격한다|고려를 공격해 들어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